예쁜 시

인연 (피천득 )

受延 2017. 9. 6. 20:05

 

"인연"

 

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

그냥 사랑이란다

 

사랑은 원래 달고 쓰라리고 떨리고 화끈거리는 봄날의 꿈같은 것

그냥 인정해버려라

그 사랑이 피었다 지금 지고 있다

 

그 사람의 눈빛

그 사람의 목소리

그 사람의 몸짓

거기에 걸어두었던 너의 붉고 상기된 얼굴

이제 문득 그손을 놓아야 할 때

어찌할 바를 모르겠지

 

봄밤의 꽃잎이 흩날리듯

사랑은 아직 눈앞에 있는데

니 마음은 길을 잃겠지 

그냥 떨어지는 꽃잎을 맞고 서 있거라

별 수없단다

 

소나기처럼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

삼일쯤 밥을 삼킬 수도 없겠지

웃어도 눈물이 베어 나오겠지

세상의 모든 거리 세상의 모든 음식

세상의 모든 단어가 그 사람과 이어지겠지

 

하지만 얘야

감기처럼 앓고 지나가야

비로소 풍경이 된단다

그곳에서 니가 걸어 나올 수 있단다

시간의 힘을 빌리고 나면

사랑한 날의

이별한 날의 풍경만 떠오르겠지

사람은 그립지 않고

그날의 하늘과 그날의 공기

그날의 꽃향기만 니 가슴에 남을 거야

그러니 사랑한 만큼 남김없이 아파해라

그게 사랑에 대한 예의란다

비겁하게 피하지 마라

 

사랑했음에 변명을 만들지 마라

그냥 한 시절이 가고

너 또한 한 시절을 맞을 뿐 

사랑했음에 순수했으니

너는 아름답고

너는 자랑스럽다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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